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프랑코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과 프랑코 == >"그 '''음흉한 돼지'''와 협상을 벌이느라 [[시에스타|또 다시 9시간을 소모하느니]] 차라리 이빨 서너개 뽑히는 편이 낫겠소." >---- >-[[아돌프 히틀러]], 1940년 10월 23일 프랑코와의 엔다예 협정에 대해 무솔리니에게 말한 소감. 프랑코는 내전 기간 중 독일과 이탈리아, 두 파시즘 국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프랑코 자신도 유사 파시스트였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두 나라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프랑코는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행동을 '''유대-볼셰비즘에 대항하는 문명의 수호자'''라며 칭송하고, 당시 스페인에 살고 있던 6,000명 가량의 유대인들의 명단을 만들어 [[하인리히 힘러]]에게 넘겨 주는 등 나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언행과는 대조적으로 프랑코는 히틀러가 한 것과 같은 유대인 박해 정책을 딱히 펴지는 않았다. 물론 15세기의 유명한 유대인 탄압이 있은 뒤 400여년 동안 다시 스페인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리베라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은 없었고 '유대인 그거 그냥 가톨릭으로 개종 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 정도의 생각만 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착하게 군 것도 아니라 정치활동의 일환으로 유대인 상점에 대한 공격을 지시한 적도 있었다.] 위의 명단도 당시 스페인 국적자도 아니고, 그냥 스페인에 살고 있으며 유대인으로 확인된 사람들만 6,000명이라 한 것이다. 주로 대부분 다른 유럽에서 도망치는 도중 스페인에 체류 중이었던 유대인들이었다. 더불어 주 헝가리 스페인 대사로 있었던 앙헬 산즈 브리즈 대사 같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외교관 신분을 사용하여 많은 유대인들의 탈출을 도운 바도 있으며, 정권이 이런 개인적 차원의 인도주의를 제재하진 않았다. 제2차대전 도중 20,000명~35,000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스페인을 통해 탈출한 것으로 추산된다. 일부 프랑코 옹호자들은 프랑코의 이런 행적을 프랑코 정권의 인도주의적 면모라 주장한다. 그러나 프랑코 정권은 정권 차원에서 [[홀로코스트]]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직접 저질렀다. 그 대상이 이미 스페인에 있지도 않았던 유대인들이 아니었을 뿐이며, 범위를 정치범까지 확장한다면 스페인도 홀로코스트 가담 국가다. 오늘날 홀로코스트 학계는 유대인, 폴란드인, 소련인, 집시 같은 인종적 분류 뿐만 아니라 프리메이슨, 여호와의 증인을 포함한 정치범들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에 포함한다. 2차 대전 개전 당시 프랑스로 망명해 있다가 [[프랑스 침공]]과 함께 나치에 사로 잡힌 공화파 스페인인 1만명 정도가 "스페인인들의 수용소"란 별명까지 붙었던 마트하우젠 수용소를 비롯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갔고, 스페인 정부는 어차피 자국으로 송환되었어도 총살했을 자들이니 나치가 이들을 절멸수용소에서 확실하게 끝장내도록 종용했다. 나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9,300명 가량의 스페인인 중 50%를 훌쩍 넘는 5,000명 가량이 마트하우젠, 다카우, 부헨발트 등에서 그 어떤 나라도 돌보아 주거나 구하려는 노력 없는 무국적자로 죽었다. 반면 이 생지옥의 와중에서도 수용소의 스페인인들은 일단 정치범들이니 신념에 따라 정신력이 강한 사람들이 많았고, 와중에는 [[스페인 왕정복고|보르본 왕조]] 말기→제2공화국→나치 치하 유럽에서 좌파 혁명가, 레지스탕스 투사로 잔뼈가 굵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보니 그 뒤에 들어온 폴란드인, 소련인 수감자들에게 노하우를 가르쳐 주는 등 수용소 내 저항 조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대전 후에는 일찍부터 나치에게 점령 당해 국가가 유린 당한 [[폴란드]]인들이 비슷하게 살아 남은 자들은 수용소 고참이 되어 그 중 지조와 양심을 지킨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적극적으로 다른 수감자를 도우며 수용소 내 저항에 핵심적인 역할을 종종 맡았는데, 폴란드는 전쟁 이전에는 군사정권 아래 반공 우익 정권이었기 때문에 이 폴란드인 수감자 중에는 폴란드 국내군을 비롯해 이데올로기적으로 따지면 스페인 공화파와 반대인 우익 가톨릭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많았다. 폴 프레스턴이나 스타니스와프 도보시에비츠 같은 스페인과 폴란드의 홀로코스트 전문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와중 실재로 마트하우젠, 부헨발트, 다하우 같은 곳에서는 스페인 공산당원/아나키스트와 폴란드 가톨릭 사제의 협력 같은 [[좌우합작]]도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 부헨발트 수용소의 경우 미군이 진주하기 겨우 며칠 전 나치가 수용소를 텅텅 비우려는 당국의 의도를 알아챈 스페인인, 폴란드인 [[카포]] 주도로 수용소 봉기가 터져서 미군이 들어오기 전 자체적으로 캠프가 해방되었다.[* 이런 신념적 [[정치범]]들이 수용소 내 저항 조직을 만드는 걸 막기 위해 일반적으로 카포는 민간 사회에서도 삐뚤어진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던 그냥 범죄자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특히 아직 전시 체제가 본격화되지 않고 홀로코스트가 정치적 박해 수준으로 머물렀던 30년대 말을 비롯하여 이따금 대규모 소탕 작전 이후 한번에 대규모로 독일이나 각 점령지의 정치범들이 대거 입소하여 이들이 카포 층을 이루었던 경우가 있었다. 게다가 정치사상적 수감자들은 일단 고학력자들이 많고 어디 조직 활동을 해 본 경험이 많았으니 중간 관리자로서 딱이라서 해당 수용소의 사정이나 수용소장 성향에 따라 오히려 카포로 더 잘 쓰였던 경우도 있었다. 부헨발트의 경우도 그렇고 수용소 문학에서 가끔 가다 나오는 양심을 지키고, 엄청난 위험을 간수하며 중간관리자로서 다른 수감자들을 더 박해한게 아니라 오히려 감싸주고 지키려고 했던 예외적인 카포들은 다수가 이런 경우이다.] 종전 후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전범 재판에 핵심적인 증거 자료가 된 수용소의 사진들을 남긴 [[친위대]] 산하 수용소 사진사였던 프란시스코 보이스[* Francisco Boix(1920~1951). 이름에서 보이듯이 [[카탈루냐]]인이었다.] 또한 스페인 공화파 수감자였다. 또한 2차대전 당시 스페인은 내전에서의 복구가 똑바로 안되었으며, 특히 프랑스와의 국경은 제대로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피신 루트로 사용했던 저 [[피레네 산맥]] 프랑스-스페인 국경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쯤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통합되어 나치 상대로는 물론이고, 종종 월경하여 프랑코군도 습격하곤 했던 공화파/좌익 잔당 게릴라도 쉽게 통과했고, 종전 직후에는 전범 재판을 피해 도망치려는 나치 인사들도 잘만 술술 통과했다. 정권의 의도와 상관 없이 기본적으로 국경을 비롯한 인구의 호구와 이동에 대한 통제가 똑바로 안되었다는 반증이다. 히틀러와 처음으로 대면했던 엔다예(엥다예) 협정에서 프랑코는 개판이었던 당시 스페인의 철도 사정 때문에 계속 열차가 연착되어 히틀러를 무척이나 오래 기다리게 했고 히틀러와 대면해선 계속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히틀러를 상대했는데, 내전 기간 중 독일의 도움과 히틀러의 행동에 대해 찬사하며 스페인과 독일은 정신적으로 동맹한 상태라고 치켜세워주었다. 그러나 정작 히틀러가 [[영국]]에 맞설 것을 요구하자 스페인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들먹이며 이를 거절했고 히틀러의 말을 끊고 자기 얘기만 줄창 떠들어 히틀러를 몹시나 빡치게 했다. 특히 모로코 시절과 내전기를 비롯하여 자기 자랑만 3시간을 떠들었다. 히틀러가 만난 사람 중에서 히틀러가 말을 못하게 자기 말만 떠들었던 건 프랑코(와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만네르헤임]])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이 협정에서 프랑코는 프랑스령 모로코와 오랑을 요구했고 히틀러는 이를 거의 일격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히틀러도 프랑코에게 [[카나리아 제도]], 모로코의 해군 기지들, 포르투갈령 [[아조레스 제도]]와 [[카보베르데]] 제도까지 고압적으로 요구하여 프랑코를 무척이나 당황하게 했다. 또한 히틀러는 지원의 대가로 스페인 북부의 광산들을 차지했고 [[헤르만 괴링]] 장군이 공화 정부에도 무기를 파는 등의 행각을 벌였으니 강한 민족주의자이기도 한 프랑코로서는 감정이 나빴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동맹 조건으로 무기 지원과 [[지브롤터 해협]], 프랑스령 북아프리카(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할양을 거는 무리한 협상으로 히틀러와의 협상을 끝낸 것 같다. 그리고 프랑코는 독일이 잘 나가던 194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 내전 '''전후 복구'''만 도와주면 당장이라도 참전해서 도와드림"이란 식으로 살랑이를 떨었으나, 이 내전 복구와 스페인군을 다시 전력이 될 만한 단계로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천문학적인 투자를 필요를 해서 히틀러가 거절하였다. 다만 이는 핑계로 볼 수도 있다. 애초에 추축국치고 계획대로 전쟁 준비를 마치고 개전한 나라가 없다. 어찌되었든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도움을 받기는 했으니 독일의 전쟁 수행에 이런저런 협력을 했다. [[지브롤터 해협]]의 중요성으로 인해 스페인의 주요 항구였던 카디스는 대전 기간 동안 [[크릭스마리네]]([[독일 해군]])의 기지가 되었고, 스페인은 '[[청색사단]](División Azul)'과 [[독일군/외인부대#s-2.4.1|'청색 비행중대]](Escuadrilla Azul)'이라는 이름으로 1개 보병사단과 비행중대를 독소전선에 파병하기도 한다. 이 청색 사단은 구성원 중 적지 않은 수가 친지, 친구 등이 내전 당시 공화파로 싸우다가 감옥에 갇혀 있어 [[연좌제]]를 피하는 겸 그들의 형기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참전했다는 비극적인 여담이 있다. 이 때 한가지 해프닝이 터졌는데 독일에서 청색사단과 파일럿들을 환영한답시고 군악대로 국가를 연주한게 하필이면 [[리에고 찬가|'공화파'의 국가]]를 연주한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파견된 청색사단과 청색 비행중대는 프랑코의 강력한 요청으로 인해 소련과의 전투에만 투입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영국과 미국[* 영국과 겉으로는 중립이지만 [[국제여단]]을 제외하면 속으로는 은근 슬쩍 국민진영과 거래를 하거나 이런 저런 편의를 봐줬다. 오히려 이 덕분에 프랑코에 대한 직간접적인 영미측 인맥과 경제적 의존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프랑코가 추축국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39년 당시 가진 의구심과 달리 중립으로 남을 수 있도록 기여하기도 했다. 가장 특기할만한 건 역사가이면서 주 스페인 미국 대사인 J. H. 하예스의 사례다. 이 사람은 42년, 45년 당시 주스페인 미국 대사로 파견나갔는데 독실한 가톨릭이라는 점 덕분에 스페인으로부터 충분히 존중받았고 자신의 지위를 활용해 스페인이 추축국에 넘어가지 않도록 했으며 덤으로 히틀러로부터 도망친 몇 만에 유대인을 포함한 정치적 난민들을 구출하는 일도 맡았다. 이 외에도 처칠의 영국은 스페인 관료들에게 뇌물을 푸는 외교 공작을 벌이기도 했고.][* 대표적인 스페인 내 친영파 거물로 왕정시기 외무장관이자 프랑코 정권의 초대 영국 대사 제17대 알바 공을 들 수 있다. 영국에도 영지가 있는 그냥 반쯤 영국인이었던 사람인지라 내전 기간 내내 줄곧 영국 상류 귀족층을 상대로 국민진영에 유리하게 여론공작을 했고 그 덕에 프랑코 정권에서도 잘 나갔다.][* 2차세계대전 당시 스페인의 정치구도를 보면 세라노 수녜르같은 파시스트가 사실상 2인자로서 각종 분야에서 프랑코에게 조언하면서 실세 노릇을 했고 가톨릭, 군부, 왕당파는 그 주변에서 화를 참아가며 지켜보고 있었다. 청색사단 아이디어도 세라노 수녜르가 떠올린 것이다. 영국은 특히 왕당파와 가톨릭을 중심으로 반독 공작을 했다. 그리고 2차대전이 끝나면서 세라노 수녜르같은 친독 파시스트는 당연히 영향력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친영적인 왕당파와 가톨릭 교회가 차지한다.] 에 대한 자신들의 경제적 의존 및 연합군의 보복을 우려하여 참전하지는 않았다. 당시 히틀러는 프랑코에게 연합군이 곧 카나리아 제도를 공격할 것이니 빨리 독일 편에서 참전하여 나라를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지키라고 위협했으나 영국과 미국은 프랑코에게 카나리아 제도를 비롯한 스페인의 영토를 침범하거나 스페인 주권을 침해할 의도가 없음을 보장했고 이에 추축국 편으로 참전할 이유가 없음을 확신한 프랑코는 외무장관을 골수 친독 인사였던 처남 라몬 세라노 수녜르에서 실리파 호르다나 장군으로 바꾸고 연합군에게 우호적인 태도로 돌아갔으며 안톤 작전에 이르러선 오히려 독일을 경계하였다. 연합국의 경우 스페인이 추축국에 가입해서 영국령 지브롤터에 위협을 행사할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우려했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영국과 스페인은 지브롤터 때문에 티격태격하는 사이기도 했고 당시에도 이를 두고 스페인에서 영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전쟁 중 한동안 국제적으로 중립지역으로 간주된 탕헤르를 잠시 점령하는 일도 벌였다.[* 이 때 탕헤르에 주둔한 외교관들은 전부 추방한다. 독일 외교관도] 이에 더해 오늘날 기록에 따르면 MI6 소속 영국 정보원들이 스페인 장성과 관료들을 매수하는 등 영향력을 확보하는 식으로 어떻게 스페인이 참전하는 것은 막았다고 한다.[* https://winstonchurchill.org/publications/finest-hour-extras/the-creeds-of-the-devil-churchill-between-the-two-totalitarianisms-1917-1945-3-of-3/] 당시 처칠의 프랑코에 대한 평가는 꽤 이중적이었다. 일단 프랑코가 조금이라도 추축국쪽으로 기울 것 같으면 비판적으로 대하다가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니 프랑코를 중립정책도 잘 유지하는 상당히 훌륭한 반공지도자로 포장하는 멘트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https://winstonchurchill.org/publications/finest-hour-extras/the-creeds-of-the-devil-churchill-between-the-two-totalitarianisms-1917-1945-3-of-3/] [[파일:external/visualoop.com/Operation-Felix-750x471.png]] '''펠릭스 작전'''에 대한 스페인의 신문 기사. 1940년 11월에 [[히틀러]]는 '총통 지령 제 18호'로 지브롤터 공격 계획인 펠릭스(Felix) 작전을 수립한다. 루트비히 퀴블러(Ludwig Kübler)를 사령관으로 1개 군단이 스페인을 통과해 스페인 공군의 지원과 함께 지브롤터를 침공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프랑코는 지브롤터를 스페인에게 주겠다는 히틀러의 말에도 작전에 협조하는 것을 거부했고, 독일으로서도 소련 침공을 위한 준비가 필요해 지중해 봉쇄는 이탈리아 해군과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의 수에즈 공격에 맡기기로 한다. 프랑코가 무기뿐만 아니라 식량, 석유에 비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식민지(모로코 전체, 알제리의 일부, 사하라 사막 등)까지 요구해대니, 아무리 지브롤터 공략이 매력적이라도 히틀러가 선뜻 들어줄 수 있을 리 없었다. 1941년에 [[히틀러]]는 또 다시 지브롤터를, 이번에는 스페인 전부를 공격할 이사벨라(Isabella) 작전을 구상한다. 프랑코가 계속 중립을 지키자, 프랑코가 연합군에 가담하거나 연합군이 [[나폴레옹 전쟁]] 때처럼 스페인을 통과해 서유럽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한 것이지만, 계획에 그친다. 이러다가 전황이 슬슬 나빠지기 시작하는 1942년부터 역으로 히틀러가 참전 좀 하라고 살랑이를 떨다가, 그 이후 독일의 패색이 확실히 짙어지자 완전히 쌩깠다. 그리고 무솔리니 또한 내심 지중해에서 다른 경쟁자가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아 등 뒤에서 히틀러에게 스페인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압력을 넣었다. 전쟁 말기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프랑코는 재빨리 청색사단을 국내로 소환하고 독일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1944년 말에 프랑코가 연합국과의 협상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들은 히틀러는 "프랑코 개새끼"라고 내뱉었다고 한다. 다른 얘기로는 연합국에서 프랑코에게 중립국인 척 하면서 계속 독일을 지원하면 스페인을 추축국으로 인정하고 공격하겠다고 했고 프랑코는 히틀러에게 그대로 하소연하면서 청색사단을 빼돌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히틀러도 만약에 스페인이 공격당하면 스페인을 지켜줄 상황도 아니고 스페인 방향에서 연합군이 밀고 올라오면 곤란해지니 차라리 친독일성향의 중립국으로 놔두는게 낫다고 판단해서 프랑코가 발을 빼는걸 허용했다는 얘기도 있다. 소련에 밀리던 상황에서 "스페인 사단만 빼갈게요" 한다고 히틀러가 곱게 들어줄 리도 없었다. 히틀러와는 다르게 무솔리니는 그 특유의 허세 때문인지 프랑코에게 그리 많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스페인에 필요 이상의 지원을 퍼부었다. 결국 이 때문에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그나마 잘하고 있던 경제분야를 고대로 말아먹어 2차 세계대전 그 숱한 병크를 터뜨리는 또 하나의 원인을 초래하고 만다. 이렇게 독일 등의 추축국 세력과 거리를 둔 덕에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권력이 무너지는 건 면할 수 있었다. 한편 이런 독일과의 관계 때문에 같은 추축국인 [[일본 제국]]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군이 필리핀 [[마닐라]]를 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성으로 터진 [[마닐라 대학살]] 와중 마닐라 주재 스페인 영사관을 일본군이 공격해서 영사관에 방화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접하자 프랑코는 당연히 격노했고, 1945년 4월 11일에 스페인은 일본과 단교해 버렸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스페인 정부에선 '사건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일본과의 관계는 유지해야 하지 않은가'라는 논란이 있었다. 그만큼 당시 스페인은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이 강했다. 이런 엄청난 외교적, 국제적 무례를 당하고 국교 단절을 하기는 했으나[* 내부적으로도 어쩔수 없었다. 스페인 입장에서 필리핀은 당장 프랑코와 같은 세대들이 초년 장교나 어린 아이였던 시절 상실했던, 아시아 유일의 스페인어권-이때만 하더라도 필리핀의 엘리트들은 아직 영어 못지않게 스페인어도 많이 썼다-가톨릭 국가였다는 점만으로 과거 스페인 제국에 대한 향수에 의존한 프랑코 정권의 자기 인식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나라였다.] "이런 행위는 지금까지 있었던 스페인과 일본 제국의 우호적 관계에 타격을 줄 수 밖에 없다"라고 상당히 소극적으로 항의하고, 학살 보도도 "가톨릭 신앙과 스페인 제국의 유산을 지키겠다며 그 난리를 쳐놓고 이런 일도 못 막나?"라는 식의 반정부 여론이 형성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건의 스페인 국내 보도도 사건 발발 이후 몇주 뒤에야 허용하는 등 심각하게 비굴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 뒤에는 "추축국들이 끝나면 우리 차례일지도 모른다"라며 두려워하던 정권의 공포와 취약함이 있었다.[* Wayne Bowen, Spain During World War 2, 2006년 작 출처] 다만, 다른 나라와 달리 일본과의 관계는 훨씬 복잡했다. 프랑코는 친추축국적 중립국이면서 동시에 영미권과도 여전히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 나라였기 때문에 막상 영미권 대사 등을 접견할 경우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같은 백인들이 어쩌구...' 하면서 일본을 헐뜯었다. 그와 동시에 자국민들에게 해외 상황을 왜곡 선전할 때, '전 세계적으로 큰 전쟁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소련에 대한 전쟁이고 하나는 일본에 대한 전쟁이라더라'고 했다. 아무리 일본이 추축국이기로서니 따지고보면 이역만리에 있는 이제는 자국하고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나라에 불과한 반면 여전히 영미권은 스페인과 중요한 관계에 놓였으니 이런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다. 청색사단 문제를 따지면 스페인을 교전 상대인 적국으로 분류할 만할 명분도 있고, 일단 국제 공산권의 거두이며 실제로도 엔리케 리스테르를 비롯한 적지 않은 공화파 망명객들이 붉은 군대에 지원했던 [[스탈린]]의 경우 아예 스페인도 추축국으로 분류하여 조지려고 하였으나, [[포츠담 회담]]에서 더 이상 전쟁을 키우기도 싫고, 좌파 공화파를 도와주기도 싫었던 처칠과 트루먼이 "스페인 저 시끼들은 무조건 국제연합에 끼워주지도 않고, 추축국 애들 급으로 경제 제재를 먹여 [[참교육]] 시켜줄거니 님이 참으삼"이라 설득하여 겨우 스탈린을 달랠 수 있었다. 스페인이 비록 직접적으로 2차대전 자체는 비껴나갔지만 연합국, 특히 소련을 비롯한 공산 세계 또한 내전 당시의 만행을 잊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2차대전 직후와 냉전 체제가 본격화된 1950년대 사이에는 동서방을 가리지 않고 파시즘에 대한 혐오 분위기가 세계적으로 대세였다. 때문에 2차대전에 휘말려드는건 피했을망정 외교적으로 스페인은 [[포르투갈]], [[남아공]], [[로디지아]]와 함께 여전히 국제적 천민 취급을 받으며 고립되었고, 위의 처칠과 트루먼이 약속한 경제제재로 인해 극도의 고통을 받았다. 이 내전 이후 2차대전이 끝나고도 10년 가까이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스페인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정권의 폭력성도 극에 달했던 1939~1955년 사이의 시절을 스페인인들은 "기아의 세월(años del hambre)"이라 부르며 스페인 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세월로 기억한다. 이 시기 프랑코는 자신의 정권이 파시즘과 무관하단 인상을 해외에 심어주기 위해 발광했고, 실제로 내전 직후 자행되었던, [[히믈러]], [[갈레아초 치아노|치아노 백작]]이 회고한 "매일마다 마드리드에서 100명, 세비야에서 50명..." 규모의 학살과 사법 살인, 정치적 '실종'은 크게 줄어들었다. 물론 이 이후로도 주기적으로 정권이 본보기로 삼을만하다 싶은 경우엔 정치적 사형을 하긴 했고, 이때마다 스페인을 반공 서방 진영에 포함시키려는 미국은 한숨 쉬고, 나머지 유럽에선 히틀러, 무솔리니의 동지 프랑코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대규모 시위와 압박이 종종 터지곤 했으나 적어도 '파시즘' 운운할 만큼 '''폭력의 일상화'''와 '''정치적 폭력에 의존한 국가 이데올로기'''[* 당시 스페인의 경우를 들자면 "건강한 스페인 민족 남아는 나약한 빨갱이를 죽이며 새로 태어나고..." 운운하던 식의 대중 동원이다. 정치적으론 고참 당원들이 숙청당하며 쩌리가 된 정당 [[팔랑헤]]였지만 이런 선동과 심리전 쪽에선 계속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학계에선 주로 1944년을 기점으로 끝났다고 본다. 이 때까지 스페인은 내전이 끝난 이후에도 2차 세계대전에 엮일 가능성을 대비해 경제사회적으로 전시체제를 당분간 유지했다.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이 되자 공화파에 대한 박해 수위도 낮추고 전시체제를 풀게 된다. 그리고 1947년 프랑코는 이미 대가 끊긴 것이나 다름없던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복권을 선언하면서 '''왕위를 이을 적합한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는 내가 섭정'''이라고 선언, 종신 집권을 합법화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